김희태 기자

2019년은 3.1운동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로, 이와 관련 최근 화성시에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발족되기도 했다. 화성시 관내에는 3.1운동과 관련한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장안면과 우정면, 향남면과 송산면 등에 관련 흔적들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또한 최근에는 우정읍과 장안면의 3.1운동 만세길 복원이 추진되는 등 3.1운동과 관련해서 많은 역사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연재부터는 다가오는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의미에서 화성시의 3.1운동 관련 지역을 소개, 우선 첫 번째 시간으로 화성시의 대표적인 3.1운동 유적지인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3.1운동 순국 기념탑의 전경     © 편집국


■ 제암리 학살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3.1운동의 역사에 있어 화성시의 사례는 초기의 평화시위의 성격에서 벗어나 폭력적인 투쟁으로 변화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당시 식민지 행정기관이라 할 수 있는 면사무소와 주재소 등을 습격, 방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함께 3.1운동을 진압하던 일본인 경찰을 사살했는데, 대표적으로 송산리 사강리에서 노구치 고조 순사부장이 쏜 총에 시위 주도자였던 홍면욱이 부상당하자 이에 시위대가 노구치 순사부장을 처단했다. 
 

▲ 아리타 판결문,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국제적인 비난에 휩싸인 일제는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했지만,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 편집국


또한 장안면과 우정면 지역에서는 가와바다 도요타로 순사가 쏜 총에 이경백이 사망하고, 시위대가 부상당하자 시위대는 가와바다 순사를 처단했다. 이러한 3.1운동의 열기는 당시 일본인들에게도 위협적으로 인지되었고, 조선군사령부의 보고를 통해서도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일제는 이 같은 화성시의 3.1운동 열기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과 보복을 자행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제암리 사건은 일제가 민간인에 행한 학살로, 지금도 이러한 학살은 전쟁범죄로 규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제의 행동은 만행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 잊지 말아야 할 제암리 학살사건과 화성시 3.1 운동의 상징적인 장소
 
제암리 학살사건의 주모자는 아리타 도시오 중위로 그는 수비병 11명과 함께 1919년 4월 15일에 제암리로 와서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교회로 모이게 했다. 이후 주민들이 교회로 모이자 아리타 중위는 교회의 출입구와 창문을 막고 사격과 함께 교회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교회당에서 23명의 주민들이 몰살당했고, 현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워낙 끔찍했던 이 사건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당시 스코필드를 비롯해 커티스, 테일러, 언더우드 등에 의해 제암리 학살사건이 폭로가 되었다.

▲ 제암리 순국 유적 내에 자리한 묘역, 잊지 말아야 할 1919년 4월 15일의 그날을 만날 수 있다.   © 편집국


학살은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적으로 공분을 일으키는 행동이었기에 해외 여론의 비난이 계속되자 결국 일제는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리타 판결문에서 보듯 그의 행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제암리 학살사건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금기어와 다름이 없었다.

해방 이후 추모비 건립을 시작으로, 지금은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화성시 3.1운동의 상징적으로 장소로 남아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3.1운동이 단순한 단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과거를 잊지 않고, 선조들이 남겨준 정신을 계승, 발전하는 것이 함께 수반될 때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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